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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은 "넌 그래도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잖아" 하고 말한다. 그 한마디에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그림 그 자체지 의뢰받아 그리는 일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함으로써 겪게 되는 부수적인 어려움도 적지 않다. '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누구나 먹고살기 위해 하는 활동이니, 그에 따르는 문제도 별반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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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인 줄 알았는데 예술을 하는 게 아니었고, 예술이 아님을 어렵게 받아들이고 있는데 예술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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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는 굴러다니는 다 쓴 유화물감 통, 다양한 크기의 넓적하고 기다란 붓, 색색의 실뭉치 등 선생님의 작업 도구를 소재로 정물화를 그리거나, 2층 작업실 뒷문을 열면 보이는 건물과 기와지붕, 가로수가 담긴 풍경화를 그렸다. 하나의 대상을 끊임없이 연구하는 화가처럼 같은 소재, 같은 화면을 반복해서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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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작업실에서 겪은 일들이 어제 일처럼 생생한 건 길을 헤매다 돌아온 아이가 서러움을 참고 억지로 그림을 그려야 했던 사건 때문만은 아니다 .그 공간을 떠올릴 때면 자연스레 시각, 후각, 청각이 동원되어 오래도록 기억 속에 남아 있게 되었다. 그림을 그리기에는 약간 어두침침한 작업실, 푸르스름한 톤으로 칠해진 엄청나게 큰 캔버스, 그 위에 덧대어진 천 조각과 촘촘히 놓인 바늘땀, 코를 찌르는 유화물감의 싸한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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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축적해온 표현력이나 타고난 것 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부단한 노력이 만들어 낸 감각,다른 이들과 다르게 보기 위해 키워온 관찰 능력은 한순간에 따라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든 긴 시간 꾸준히 쌓아온 것을 이길 수는 없다. 하지만 누구나 살아온 만큼의 경험과 그것을 통해 느낀 생각, 자신만의 관점이 자기 안에 축적되어 있다. 무언가 그리고 싶은 게 있다면 어떻게 그릴지 방법을 모르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우선 생각을 꺼내서 어떤 방식으로든지 그려보고, 또다시 그리고, 계속 그려보자. ' 내 그림'이라고 칭할 수 있을 때쯤 다른 이들도 나를 그림작가로 불러주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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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아름답고 행복한 기억만 그릴 필요는 없다 .그림에는 분출의 기능이 있으니 떠오르는 것을 자연스럽게 토해내면 된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입을 여는 것처럼 그림도 글도 하나의 소통 방법일 뿐이다. 머릿속에 맴도는 것에서부터 그려나가면 된다. 그래도 아무렇게나 뒤죽박죽 떠오르는 것은 도저히 그리고 싶지 않고, 어디서부터 그려야 할지 모르겠다면 자주 접하는 상황부터 손대는 것이 좋다.
출근길이나 등굣길에 매일 만나는 지하철 안 사람들, 점심시간마다 마시는 커피처럼 익숙한 소재, 친근한 감정은 낯선 것에 비해 표현하기 쉽다. 아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관찰하고 있었을 테니 형태를 잡는 데도 손이 수월하게 움직일 것이고 ,자주 접한 만큼 거기서 얻은 에피소드가 다양할 가능성이 높다. 특별한 것을 찾을 필요 없이 자신의 일상이 가장 좋은 소재다.
간혹 인터뷰를 하면 어디서 영감을 얻는냐는 질문을 받곤 하는데, 많은 사람이 궁금해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내 입에서는 특별한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나의 답은 '일상'이기 때문이다. 다른 작가의 소개 글에서도 '소소한 일상을 그리고 있습니다'라는 표현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게 사실이다. 소소한 것들에서 다르게 보이는 지점을 찾아내는 것일 뿐, 영감은 언제나 보통의 나에게서 나온다. 다른 작가들도 큰 틀은 다들 비슷할 것로 생각한다. 자신과 함께 사는 고양이나 개의 움직임을 그리는 작가도, 우주의 탄생이나 심오한 철학을 담은 상상의 공간을 그리는 작가도, 분홍색 접시에 담긴 아기자기하고 예쁜 조각 케이크를 그리는 작가도, 기괴한 형태의 초현실적 괴물을 그리는 작가도 모두 마찬가지다. 각기 다른 물체와 행위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그에 앞서 대상을 바라보면서 무언가 표현하고 싶다는 감정을 느낀 것은 동일하다. 영감의 대상이 무엇인지보다 대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중요하다.
(...) 나무를 볼 때 어떤 부분에 눈에 들어오고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지 살펴보고, 그 부분을 강조하거나 세밀하게 표현하면 남과 다른 시선을 가진 글과 그림이 나올 것이다. 그렇게 하면 무엇을 쓰고 그리든 유일한 내 것이 된다.
자기 생각을 그대로 표현한 그림이 쌓이면 의도하지 않아도 하나의 카테고리가 만들어진다. 나에 대해 그렸을 뿐인데 자신이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무엇을 계속 그리고 싶은지 저절로 방향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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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을 받는다는 건 감정의 문이 열렸다는 뜻이다. 그 문을 통해 받아들인 신선한 이야기와 눈에 보이는 형태, 순간의 인상과 평소에 가지고 있던 고민이 뒤섞이며 그림과 글이 만들어진다. 같은 것을 보고도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정도와 표현하는 내용이 다르다. 충분한 경험을 하고 다양한 일을 겪었음에도 무엇을 쓰고 그릴지 잘 모르겠다면 감정이 닫혀 있는 것은 아닌지,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확인해봐야 한다.
소재 수집은 나에게는 감정 수집과 같은 말이다. 감정을 수집하고 축적해놓는다. 시시해 보이고 밋밋한 그 수집품들이 뒤이어 들어온 다른 감정과 부딪히고 얽히면서 어떤 매력적인 소재로 탄생하게 될지는 작가 자신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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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은 가끔 이야기가 더 전개될 것 같은 상황에서 갑자기 끝을 맺기도 한다. 한창 달아오르던 마음은 모호함 앞에서 갈피를 못 잡고 어디로 뻗어 나갈지 잠시 당황하는데, 그 불친절함이 내게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처음부터 글을 다시 읽어가며 등장인물의 마음을 살핀다. 그리고 내가 작가가 된 듯 뒷이야기를 상상해본다. 마치 그림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지 않아 관객이 무한한 세계를 상상하게 만드는 것처럼 단편소설도 그림과 비슷한 매력이 있다.
쓰고 그리는 데 있어 내가 좋아하는 방식 또한 모든 걸 보여주지 않고 적당히 감추면서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표현이다. 보는 이가 여러 단서를 통해 당시의 감정이나 상태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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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은 작가가 어떤 의도로 그림을 그렸는지 알고 싶어 한다. 나는 그런 관객에게 역으로 어떻게 보이냐고 묻는데, 내 의도보다 더 다양하고 흥미로운 대답이 나오곤 한다. 그림을 보는 방식에는 정답이 없기 때문에 관람객의 생각을 듣는 걸 좋아한다. 책이 독자의 독서라는 행위를 통해 온전하게 완성되는 것처럼 그림도 보는 이의 시선에 따라 여러 가지 이야기를 지닌 그림으로 재해석, 재탄생되는 과정을 통해 완성된다. 그래서 내가 그림의 의도를 설명하는 것이 정답처럼 들리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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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보는 이의 영혼의 문을 활짝 열어 다른 세계로 나아가게 하고, 해석의 폭을 자유롭게 확장시킨다. 글은 독자를 저자의 영혼의 문안으로 초대해 그 세계로 깊이 빠져들게 만들고, 내밀한 영역을 탐구하게 한다. 그림은 도끼처럼 훅 치고 들어와 관객 자신도 모르게 울림과 타격을 주고, 글은 섬세하고 예리한 칼날로 천천히 날카롭게 감정의 정확한 부위를 쓸어내 저릿함과 쓰라림을 느끼게 한다.
그림이 저 너머의 다른 차원으로 멀리 날려 보낸다면 글은 블랙홀처럼 한없이 끌어들인다. 각자가 지닌 매력과 힘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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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는 그 책의 첫인상이다. 책의 느낌을 제대호 드러내면서 속내는 감춘 듯한 표현으로 궁금증을 자아내는 역할도 같이 해내야 한다. 큰 캔버스에 그리듯 웅장함이나 숭고함을 내세워 압도할 수도 없고 여러 장의 그림을 연결하여 천천히 감정을 끌어낼 수도 없으며, 입체감 있는 효과나 특수한 이벤트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다. a5 사이즈 정도의 작은 공간이라는 동일한 조건 아래 서로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점의 매대에서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으며, 온라인 서점에서는 손톱만 한 얼굴을 들이밀고 나를 좀 봐달라고 소리치고 있다.
표지에는 원고의 내용, 책의 분위기, 숨겨진 저자의 메시지, 장르만의 색,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만한 요소, 이 책을 읽을 독자층, 매대에서 눈에 띌 주목성, 내 색을 잃지 않으면서 대중을 설득시킬 매력 등 담아내야 할 것이 많다. 앞서 말한 광고와 포스터의 기능까지 수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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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
정해진 방법은 없지만 먼저 자기 색이 담긴 포트폴리오를 준비해서 일러스트레이터 모음 사이트에 그림을 올리고 꾸준히 업데이트한다. 처음에는 정식 전시가 힘드니 대관료가 없거나 낮아 부담이 적은 카페 등에 작품을 전시한다. 또 일러스트레이션 페어에 참가하고 독립출판물을 만들어 그림을 여러 곳에 노출한다. 시작은 어렵지만 한번 일을 맡으면 그 후에는 보통 작업물을 눈여겨본 이들 덕에 일이 계속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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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
프로젝트 일정이 자기 스케줄과 맞지 않아서 일을 거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생긴다. 자신의 ㅇ현재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고 다음 작업은 함께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 이후 관계를 이어갈 인연을 만들어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