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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부터 평소에 안 읽던 시를 읽기 시작함.
좀 기대되는 부분은 여기에 있다.
시는 읽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이 많다고 들었다.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쓰게되지 않을까...
내가 쓴 시는 과연 어떨까 엄청나게 기대됨 ㅋㅋㅋㅋ
좀 중2스러운 발언이지만, 정말 저렇게 생각한다.
이 시집은 소리 내어서 읽을 때 입에 착착 감기는 문장이 많다.
이래서 시구나 싶음
*밑줄 있는건 시 전체 , 그 외엔 일부만.
012 - 인기척
기어코 여기 와 누운 몸이 있었기에
뒤척임도 없이 저렇게 인기척을 내는 것
014- 파도의 귀를 달고 개화하는 튤립
파도의 귓바퀴 속을 걸어들어가봐
튤립 싹이 왜 귀부터 여는지 알게 될 거야
(...) 왼쪽으로 세 번 오른쪽으로 두 번 또 왼쪽으로 한 번
길을 몇 번 꺾다보면
번호를 잊어버린 녹슨 금고 앞에 선 것처럼 아득해져서
어디 먼 데를 향해 귀부터 열게 되거든
020- 환생의 조건
고흐가 파묻은 씨앗에 물을 주지 않은 것에 반성하는
이상한 꿈을 지나
내가 축낸 이십일 세기의 노오란 햇살 한 두름을 지나
사치와 허영의 시간을 지나
찬양받은 그의 한쪽 귀와 말라붙은 물감 밭을 일궈내어
내 잠의 깊이만한 뿌리를 캐낸다
023 - 잎과 잎 사잇길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것이 나무의 뜻이 아니어서
거리는 추상이다
잎과 잎 사이는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므로
추상은 고유하다
잎과 잎 사이는 울돌목의 파도가 지나가는 해협,
새 울음이 추상을 토악질한다
아무리 게워도 죽음은 추상이다
한 사람이 떠난 발자국과 발자국 사이가
잎과 잎 사이처럼 갈 수 없는 거리여서
거리는 죽음에 고유하다
잎과 잎 사이
조류가 거세어서 우는 소리로 들린다는 울돌목
그 해협을 가르며 새 한 마리 날아오른다
잎과 잎이 공허한 추상으로 떨어진다
024- 바람의 뼈
시속 백 킬로미터의 자동차
창밖으로 손 내밀면
병어리 한마리를 물커덩 움켜쥐었을 때 그 느낌
바람의 살점이 오동통 손바닥 안에 만져진다
오물락 조물락 만지작거리면
흰 눈 뭉치는 소리를 낸다
저렇듯 살을 붙여가며
풀이며 꽃이며 나무를 만들어갈 때
아득바득 눈 뭉치는 소리가 사방천지 숲을 이룬다
바람의 뼈가 걸어나간 나뭇가지 위에
얼키설키 지은 까치집 하나
뼛속에 살을 키우는 저 집 안에서 들려오는
눈보다 더 단단히 뭉쳐지는 그 무엇의 소리
025- 간섭하는 귀
물소리 끝에 풀벌레 소리가 다리를 덧댄다
027- 치매는 차마 치마를
여긴 너무 따뜻해, 아버지!
030- 비스킷 속에서
좀 깨진 눅눅한, 먹다 남겨둔
비스킷에 몰리는 개미들처럼 그렇게
모로코의 카르타고 유적지, 그 말발굽 문으로 들어간다
(...) 우리가 있는 곳이 먹다 만 비스킷 속이라는 것을
조각조각 물고 나와 번쩍 들어 보여준다
036- 병의 세계에 관한 연금술사의 과대망상
어미가 연금술사가 되는 과정을 알기 전이니
이 병으로 온전한 돌을 잉태할 수 없다
그 어떤 돌도 이 병을 선택하지 않았으므로
생식에 관한 한 병은 돌의 선택 너머에 있다
출산과 육아에 관한 책은 많았고
병은 주둥이를 열어젖혔지만
돌의 문양과 크기는 달랐다
돌의 출산에 알맞은 병을 얻는 건 기적에 가깝다
보폭을 가늠할 수 없는 병 속의 계단과도 무관하게
병목현상은 곳곳에서 일어났다
병에 들어가는 것만큼 실험적인 운명은 없다
돌이 선택한 병의 세계는
출렁이며 건너가거나 터널로 통하는
사통팔달
아시아를 넘어 유럽
태평양을 건너 아메리카
병의 실험 속에 떠다니는 대륙들
돌로 금을 만드는 건
병의 세계에서 흔히 있는 일은 아니지만
어미의 꿈은 여전히 연금술사가 되는 것
044- 울창한 우울
우울한 아이를 위하여 물구나무서는 어미가 있다 배꼽을 다 내보이는 어미가 있다 발목을 접질린 어미가 있다 생피를 쏟는 어미가 있다 우울은 울창한 비, 우물을 들여다보면 머리카락이 보이는 비, 혼령이 망령에게 말 걸게 하는 비,
빗줄기를 자르면 자꾸 생기는 우울의 꼬리, 우울의 꼬리를 잡으려다가 우울에게 꼬리를 물린 어미가 있다 고층 아파트 하나 남은 불빛처럼, 바깥을 내다봐도 자신만 보이는 밤의 유리창처럼
우울은 허밍, 울창한 빗물, 우울이라는 깔때기에 걸린, 할딱 뒤집어진 우산 속으로 쥐똥나무 이파리들이 몰려든다 벌레처럼 서로 머리를 맞댄다 공격과 방어가 뒤엉킨다 아이 정수리로 들어와서 어미의 목으로 비겨나간다
정수리에도 목에도 꿈틀대는 다족류들, 고독을 가지고도 고도를 가진 우울이 거적처럼 그 위를 덮고 또 지나간다 쥐와, 쥐똥과, 쥐똥나무가 울창해진다
045- 커튼콜
붙잡아둘 수 없는 게 있었네
자전거가 은행나무를 놓아주었고
지느러미가 물살을 풀어주었네
아이가 여가수가 될 도안
노래는 전염병을 놓아주었고
예언이 무대를 떠나가는 게 보였네
나는 쇳소리를 내며 붙잡았지만
곡조는 뾰족이 흘러갔네
새벽은 반드시 돌아오고
모든 것을 붙잡는 시간이 오고야 말았네
어깨를 흔들던 울음도 붙잡혀 있네
아이가 가져가고 남은 것을 뒤적거려서
쓸 만한 것을 찾아보았네
눕히면 눈을 감는 인형 하나
땅을 흔들어 깨우며
반짝 눈을 뜨네
나는 비슷하게 울 줄은 알기에
무대가 정해주는 자리에 오뚝 앉았네
눈은 떴지만 수도 없이 깜빡거렸네
그렇게 붙잡아둘 수 있는 게 없었네
046- 당신이라는 잠
당신은 아주 깊은 잠에 빠졌고
나는 그 잠이 부풀려놓은 공갈빵 속으로 들어가려 안달한다
당신은 하루를 어디서 묶는지
나는 별것 아닌 것에도
당신 것이라는 이유로 매듭이 된 별을 쳐다보며 공갈빵을 부숴 먹는다
버튼홀 스티치,
그것은 단춧구멍보다 별이 우선인 자수법
바늘로 매듭을 짓는 기법이지만 사실
뾰족한 마음들을 이 별 저 별로 옮겨놓고 있다
내가 버튼홀 스티치로 또박또박 수놓을 때
당신은 연습 삼아 한 번씩 드나드는 단추처럼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도 본다
당신 입이 아무리 크다지만 공갈빵이 한입에 냉큼 들어가진 않는다
가도 가도 당신은 내 수틀 안에서 기웃거리고
천이 만든 빠끔한 별들만
바늘을 기다리고 있다
나는 콕, 또 콕, 당신의 꿈을 찔러본다
공갈빵이 한꺼번에 빵, 터질 때까지
047- 황무지가 되게 하는 조건
풀과 돌의 관계는 비대칭적일 것
사람과 흙의 관계는 역설적일 것
하늘과 산의 관계는 상호보완적일 것
나와 당신의 관계는 불가분일 것
그래도 찾는 것이 있다면 그건 황무지가 되는 것
052- 그건 됐구요, 고래고래 잡으러
현관문을 잠그고 중문을 닫고 방문도 꼭 닫는다
목소리가 빠져나가지 않는 가두리 양식장에
엄마와 딸의 고래고래
짧은 교복 치마 밑으로 불쑥 기어나오는 고래와
고래고래 박자도 못 맞추는 고래
처음부터 미끄덩 잡히지 않는 딸과
애초에 손이 없는 돌고래 엄마
옆방 아들은 이어폰 끼고 나왔다가
고래고래를 지나
긴 바게트 하나 물고 다시 들어가고
두 고래는 입을 크게 벌려 서로 잡아먹을 듯이 고래고래
목구멍을 뚫고 올라오는
고래를 보여주려 서로 안간힘 안간힘
엄마는 끌고 딸은 당기고
어두컴컴한 방이 고래 비린내로 가득차는 줄 모르고
그것이 중앙집중식 난방의 불고래 속인 줄도 모르고,
뜨끈뜨끈하게,
053- 그래서 나는 퉁명이라는 금붕어를 키우기로 했다
당신은 키가 크니까
저 창문 좀 열어주세요
그녀의 노크 소리는
매일 똑같은 소설 문장이다
내 창문은 하늘이 찰랑거리는 상자예요
창문을 열어줄 때마다
올 나간 방충망 같은 그녀 눈동자로
거미가 들락거린다
깡마른 그녀 방에는 기포 발생기가 잠겨 있다
오픈 누드 수조지만 호흡이 가팔라진다
그녀가 종일 칭얼칭얼 요구하는
이 수조에는
퉁명이라는 동공을 가진 금붕어가 필요하다
056- 하관
아버지께 업혀왔는데
내려보니 안개였어요
060 - 벌침
머리와 가슴 위로 파도가 지나간다
벌린 아가리만큼 하늘이 꽉 물리는 비명
어깨에 꽂힌 침이 꼿꼿해질 때
아버지 동공이 내 눈꺼풀을 밀고 들어온다
동공이 사라진 아버지의 풀린 눈
파도의 강약은 어디론가 나를 떠메고 간다
네팔의 바그마티 강,
붉은 보자기에 묶인 내 몸이
물위로 혹은 물속으로 넘실댄다
내 귀에 이렇게 물이 꽉 들어차다니
아버지의 동공은 마냥 묽어지고
내 동공은 더욱 붉어진다
침대가 뱃머리를 틀 때
미지근히 끓어오르던 진혼곡
아버지 하얗게 여윈 다리가
빨랫방망이처럼 먼저 떠내려간다
겨우 한 보따리 채운 내 몸이 기우뚱거리며 따라간다
수장에나 따라올 법한 저 강물 소리
아버지의 욕창이
영혼처럼 내게 들어와 번진다
독이 퍼져 나는 더욱 묽어진다
064- 월경
장례 절차는
감시 카메라가 돌아가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대낮에 켜져 있는 키 큰 가로등처럼
나는 도드라지지도 않는 목소리로 울었다
065- 모래시계
저 나무의 반은 비웠구요
저 나무의 반은 채웠어요
비운 건 겨울나무 가지 같은 통장이었고
채운 건 허리쯤까지 차오르는 빚이었죠
한 그루 나무에서 뻗어나온
욕망과 배짱으로 채운 꽃가지는
한 편의 영화였죠
하드핑크로 꽃잎을 물들이고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를 뒤적거려 잎을 채워도
여전히 스크린은 어두워요
반은 벗고 반은 채워야죠, 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저 나무
거기서 바라보는 한은 모래가 다 빠질걸요
속삭이는 모래바람에 한 시절이 너무 애절해지지 않도록
빚은 더욱 풍성해졌어요
이제 저 나무에 이어
내 몸에서 모래가 다 빠질 차례라구요
069- 라스코 동굴의 기억
강아지풀만 맥없이 말라갔다
하룻밤의 시간이 나무토막처럼 굳어 있는
내가 서 있는 곳은 모래산이었다
070- 오픈 유어 아이즈
어둠은 주먹이 단단하여
불로 지져야만 겨우 손가락 하나씩을 펴 보이는데
서쪽 창가에 앉은 여자는
다 타버린 노을처럼 얼굴이 없다
새벽을 몰고 나간 남자는 돌아올 생각도 않고
아이들 돌아올 시간도 아직 멀다
창은 벽이 되어
유년과 청년과 장년이 뒤섞인 영상이 돌아가고
무성영화의 몸 없는 말이 귀에 왕왕댄다
오픈 유어 아이즈
귀에서 눈으로
장년에서 유년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는 영상들
밤에는 터널 속이 더 환해요,
터널 같은 눈을 뜨는 여자
어둠의 관성은 저 눈꺼풀에 있다
076- 느린 우체통
터널도 길이라고 꽃 없이 말하던 어린 내 습관처럼
부챗살 오기가 줄기를 꺾던 시절이었다
088
이번 시집의 관심사는 '소통'이다. 이것을 염두에 두다보니 자연적으로 우리 신체에서 소통의 첫 창구인 귀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다. 귀로 들은 것에 대한 질문도 많아졌다. 세상에 대한 의문과 사람에 대한 관심과 자신에 대한 끝없는 질문을 시로 표현하고 싶어진 것이다. 처음부터 아예 귀가 닫혀 있는 질문도 있고 아무리 들어도 도무지 알 수 없는 주문도 있다. 살아온 연륜에 의해서, 혹은 지금 살아가는 방법에 의해서, 또는 지금 지니고 있는 생의 한 지점의 문제에서 각기 다른 소통 부재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전쟁을 겪으면서 귀 고막을 잃어버려 아예 소통이 막혀버린 아버지 세대와 사춘기를 겪으면서 소통의 귀를 아예 닫아버린 세대의 모습을 관찰하면서 시 속에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그것이 꽃으로 피고 비로 내리고 또 때로는 줄행랑치는 한 마리의 새가 되기도 하는 삶으로 누구나와 끊임없이 소통하는 것이다. -<'피로사회'의 처방전, 그 소통의 시로 다가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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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훼손은 사진이나 도면 등 시각적인 도식으로 심각성을 지각할 수 있는 반면에, 사라져버린 소리는 건축가의 도면이나 지리학자가 그린 등고선 지도처럼 뚜렷하게 남을 수가 없다. 소음공해와 더불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 부재 역시 서로가 내는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데에서 나온다. 사람은 말로만 소리를 내지 않는다. 우리가 홀로 외부의 소리가 차단된 닫힌 공간에서 완벽한 침묵 상태에 있을 때에도 우리 몸속에서는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려오고 의자가 삐걱대거나 몸을 움직일 때마다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