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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일기

사뮈엘 베케트의 말 없는 삶

아무튼 쓰고 그림 2018. 7. 11. 07:26

나탈리 레제 - 사뮈엘 베케트의 말 없는 삶 

(책은 디게 고급스러운데.. ㅠㅠ 찍은 사진 말잇못.. 아니 왜... 공식사진 중에서 괜찮은게 없냐고요.. 회색 페인트통 사진밖에 없음...)


단순히 책 표지가 예뻐서 빌림...(난 예쁜거에 약함) 그리고 얼마나 재미없는 책이면 책이 매우 깨- 끗 했음.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 예쁘니까 봐줬다..

천재고, 작가에, 잘생기면 이렇게 살 수 있다. 죽어서도 빨아주는 사람을 켜켜히 쌓는다면 30층 아파트 높이는 될 듯...

심지어 외모, 말투, 생활방식, 낙서, 흔적, 목소리, 삶의 모든 부분을 덕질하다니.. 진성덕후 인정합니다...

솔직히 아이돌 사생팬이랑 뭐가 다름.. 다른 부분을 말해봐... 

나는 그정도까진 아닌거 같은데, 다행이라고 생각해야하나. 아니면 감수성이 없거나 뇌가 똑똑하지 못해서 그런 작품을 읽어도 치이질 않는걸테니 슬퍼해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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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무기인 '그런데'나 '그러므로'라는 말을 쓰지 않고, 추론에 기대지 않고, 결정의 가능성을 최소한으로 하고, 그 자신의 작품에 주석을 다는 사람들에게 종종 얘기 했듯 "그 빌어먹을 놈의 논리" 를 사용하지 않는 것. 대신 텅 빔과 충만이 교차하고 부분들이 이리저리 분산하는 몇개의 시퀀스만을 남기는 것. 말하자면 달랑 가구 몇 점 딸린 방을 두서없이 방문하는 일을 떠올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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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이중 언어의 사용을 경험한 사뮈엘 베케트가 유일하게 번역의 어려움을 느꼈던 경우가 있었다면 그 계기는 아마도 '탄생(naissance)' 이라는 말이 제공하였으리라. 세상으로 나오는 일, 그 긴 광기의 여정을 말하면서 입과 혀가 부드럽고도 단호한 방식으로 'birth'의 발음을 만들 때 잇새로 살그머니 그리고 찰나적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혀의 움직임을, 같은 말의 프랑스어 발음 '네상스'는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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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들이마시는 공기에는 정신의 맛 같은 것이 배어 있다." - 쥘 로맹 <어떤 이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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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스스로를 친구라 일컫던 한 무뢰한에 의해 도촬된 베케트의 영상물 몇 장면을 보면 그의 표정이 지닌 완벽한 우아함에 놀랄 정도다. (...) 그러나 다음 순간 그가 몸을 일으키자 돌로 만들어진 듯한 그 커다란 몸이, 독수리 같은 시선을 한곳에 고정하는 것으론 가히 챔피언이라 할 사람이 돌연 무한한 섬세함을 발하며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머리의 축이 끊임없이 이동하고 목덜미가 기울면서 아름다운 선율 같은 궤적이 그 얼굴에 떠오르는 모든 상태를 하나로 조직한다. 이후의 또 다른 영상을 보면 역광 속에 거의 춤추는 듯한 자세로 성큼성큼, 어깨를 움직이며 느리지만 가볍고 자유로운 발걸음으로 멀어져가는 그의 긴 실루엣이 나타난다. 앞서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내적인 공허의 통어, 그리고 반추의 완벽함 및 그것의 일시적 정지가 그의 모습에서 확인된다. 

솔직히 이거 읽고 깜짝 놀랐다. 걍 앉았다 일어나서 걸어가는 모습 하나로 저렇게까지 찬양할 수 있는거지. 베케트가 살아서 이렇게 쓰인 문장을 읽었어야 했는데... 이정도 찬양글은 무덤파서 깨우고 들려줘야 하는 수준 아닌가. 

https://youtu.be/LtMUL0aDFO8

여기서 몰카를 볼 수 있음. 나는 보고도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밑에는 "정말 찍는 걸 몰랐을까?" 라는 회의적인 댓글도 있음. 나도 그분과 뜻을 같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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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달 동안 독일 땅을 이리저리 헤매 다닌 이 여정은 끝없이 우울한 여행이자 미리 세운 계획을 맹목적으로 완수하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그 점을 알고 있었듯이, 이 여행이 어딘가에 이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떠나기 위해서 도모한 것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져 간다."

(...)"나는 아주 슬픈 기분으로 많이 웃었다." 그는 진종일 걸어다니거나 도심을 둘러보거나 동물원(무척이나 중요한 이 동물원)과 묘지, 그리고 미술관 등에 들렀다. 하지만 그것이 산책은 아님에랴. 이 휴양지에서 저 휴양지로 즐겁게 거니는 기분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쓴다. "무기력, 우울. 이제 여기엔 아무것도 없고 내 앞에도 남은 것이라곤 그저 서글픔과 가책뿐." 그는 몸을 질질 끌며 자신도 잘 알지 못한 채 지옥의 순환 고리를 따라간다. 나쁜 날들이란 생각이 고갈되고 혀가 달라붙은 채 냉랭하고 비참하게 떠도는 날들. "다른 나라의 언어로 침묵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전전긍긍하다니, 이 얼마나 자가당착적인 일인가! 나는 완전히 부조리하고, 완전히 터무니없다. 자신을 한 차례 더한 침묵의 주인이 되도록 하기 위해 이토록 애를 쓰다니!" 가장 좋은 경우란 작업 계획이 있는 것. 회화에 발을 들여놓기 위한 방법론 탐색이나 비가시적인 것에 대한 면밀하고 계획적인 연구 따위. 그럴 때 그는 베데커판 가이드북을 손에 든 채 목록을 작성하거나 이미 방문한 장소들에 표시를 하고, 꼼꼼하게 계획서를 짠 뒤 카탈로그에 주석을 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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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코는 일찍이 18세기 초반에 이런 말을 남겼던 것이다.

"무릇 뛰어난 시인이 되기를 원하는 자는 자기 고향의 말을 잊어버리고 말들의 최초의 불행 상태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다시 주조해야 할 재료인 이 말들. 조이스는 그 재료를 자기 모국어의 오래된 다이너마이트 단지 안에 넣고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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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사유와 대상을 분리하는 거대한 공간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지, 그 길을 알고자 한다. 작가는 그 공간을 "그것이 원한으로 가득한 것인지, 향수 어린 것인지, 아니면 단지 우울한 것인지에 따라 일종의 무인지대로, 가령 다르다넬스해협 같은 것으로, 또는 텅 빈 것으로" 나타낼 수 있다, 고 베케트는 진술한다. 빈 것의 형태. 또는 사라진 사물들을 위한 묘비. "따라서 두개골 어둠 속에서 홀로 끝나기 위해 목도 윤곽도 없는 텅 빈 구멍 그냥 상자 어둠 속 마지막 장소 텅 빈 구멍." 때로 그는 그것을 질서를 정돈하는 하나의 형태라고 부기도 할 것이다. 혹은, 달린 손 조차 없이 움직이지도 일어서 있지도 못하는 형태라거나(아니면) 움직임 속에서 유지되는 형태, 계열들의 반복과 베리에이션으로부터 태어나는 형태라고 부르기도 할 것이다. 추상. 분리. 그리고 마침내 상실은 위로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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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8층 방에서는 몽파르나스 역으로 이르는 철도가 보인다. 모든 작가들은 저마다 하나의 방에 스스로를 유폐한다. 때때로 그 방은 카페의 형태를 띠거나 여객선, 또는 강가 오솔길의 형태를 지닌다. 그곳을 작업실이라거나 집필실이라고, 하다 못해 확성기라고 부를 수도 있으리. 어쨌든 그것은 언제나 방이다. 베케트는 방에 처박힌다. 그는 다시 한 번 쥘 로맹을 읽어본다. "나는 들어서야만 하리/ 내 생각 아래의 피신처로/ 혼자 머무르는 나의 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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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들 말로는 한 작가의 생애에 관해 던져야 할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라고 한다. 그는 무엇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는가?  작가들은 언제 글을 쓰는가?

(저 사진은 자코메티 나무.. 사진 좀 첨부해 주지.. 내가 꼭 구글링 하게 만들어요... 책들은 다 불친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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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들에 따르면 사진은 단 하나의 자리, 단 하나의 순간만을 가진다는 점에서 죽음과 마찬가지라고 한다. 그러니까, 바로 이 자리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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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좋아서 들떴다. 위대한 작가에다 미남, 거기다 경험이 없다시피 한 이 연출가는 퍽이나 세심하구나, 그와의 작업은 아주 이상적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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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절 어째서 함과 클로브 얼굴이 빨개야 하는 겁니까? 또 쓰레기 통 속의 늙은이들 얼굴은 왜 하얘야 하는 것이고요? 이유는 "나이나 원기, 아니면 혈압 때문인 겁니까?" 하고 연출가는 묻는다. 그리고 말을 잇는다. 이 질문에 자세한 답신을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그렇게 정하신 동기를 글로 설명해 주신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그럼 작업에도 도움이 되고 배우들도 의문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극 해석의 전반적 수준을 높이는 데도 보탬이 될 것이고요.

그가 대답한다. 그건 그냥 베르테르의 외투가 초록색이었듯이 빨간색이고 흰색일 뿐이오. "얼굴이 붉거나 하얀 것은 아마도 베르테르의 코트가 녹색인 것과 다름 없는 일일 겁니다. 모든 것에서 깊은 이유를 찾으려 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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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니야(Pas moi)>에서 그것은 텔레비전 속 거대하게 클로즈업된 입니다. 가장자리 윤곽이 뚜렷하고 탐스럽게 축축한 그것이 무엇인지, 보는 사람은 그 모습이 나타나는 순간 즉각 알아차린다. 명백히, 입이다. 스스로를 지탱하며, 사물들의 근본을 드러내는 대신 그것을 연관시키는 입, 고래 고래 울부짖거나 헤벌어졌거나 비참함에 빠진 입이 아니라 반대로 정확하고 효율적인 입, 더도 덜도 아니고 형태를 갖춘 입. 그런 입이, 말을 한다. 입이,<나는 아니야>의 첫머리를 발음한다. "세계.... 세계로 태어나는 것... 이 세상... 이 아무것도 아닌 작은 끄트머리...." 우리는 입을 바라보고 그것에 귀를 기울이는데,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그 입은 형태의 일그러짐 속에서 흔들린다. 크게 불안해하지도 질겁하지도 않으면서, 입은 단순하고도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다른 것이 되어간다. 퍼져 누우면서도 동시에 수다스러운 입은 마치 몸의 축소판이나 작품 전체를 동요시키며 기어다니는 저 다족류 동물의 수축과도 같으며, 시선은 때때로 지극히 건강하고 새하얀 치아, 섬광처럼 드러나는 빛나는 그 뼈의 앙금 위로 얹히기도 하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입술의 부푼 삶, 무기력하면서도 명확하며 제 윤곽 속에 완벽하게 포착되고 지탱되는 그것에 오랫동안 머무르기에 그 떨리는 살, 전율이 훑고 지나가는 연한 두게가 사방으로 저 자신을 비틀면서 하나의 구멍으로부터 가차 없이 말들의 기나긴 연쇄를 풀어내는 광경만을 향하게 되는즉, 우리는 목소리는 듣는 둥 마는 둥, 미처 측정할 수도 없을 만큼 빠르고 정확하여 거의 묘기의 경지에 다다른 경련과 날선 듯 정확한 분절에, 형성하고 리듬을 부여하고 분리하고 모으고 다시 시작하다 멎다가 박자를 가하면서 " 세계... 세계로 태어나는 것... 이 세상... 이 아무것도 아닌 작은 끄트머리/..." 라는 시원의 사건을 형성하는 이 모든 것에, 살의 온각 위치들을 엄정하게 조합하는 입에, 떨면서 언어라는 질료를 절개하는 입에, 살과 뼈이자 글쓰기의 단호한 제스처인 그것에 온통 넋을 빼앗긴다. 

와...저거 쓰느라 힘들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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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재차 그 이유를 묻는다면? 방법론의 문제 때문이다. 텍스트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미지에서도 베케트는 멀찍이 물러나서 냉정하게 바라보는 존재를 탐구한다. 텍스트에서 그것은 아이러니에 의해서, 이미지에서는 대물렌즈 -  그의 말을 따르자면, " 야생인의 눈"을 통해 수행된다. 무엇이 이 시산을 가차 없게 만드는가? 바로 그것의 지속적인 적용이다. 멀리서부터 다가와 배우의 입술 근처에 정지하는 길고 음흉한 이동ㅎ촬영이든 유일한 한 장면의 일반 고정 컷 촬영이든, 카메라는 탐문관과 같은 단 하나의 움직임을 통해 세부를 낱낱이 파고든다. 몽타주 작업은 없거나 지극히 드물다. 어쩌다 배우나 기계가 장애에 부딪혔을 경우엔 모든 것을 고스란히 다시 찍고, 그러면 카메라는 또다시 전 과정을 냉정하게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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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이 지난 후, 베케트를 알았던 사람들은 앞다투어 그를 향한 사후의 사랑을 차지하려 들거나 그에 대한 기억을 서로 시샘하곤 했다. 또는,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건네졌던 베케트의 목소리라든가 역시 오직 자기 자신만을 애정으로 감싸 안았던 그의 시선, 오직 자기 자신만이 함께 나눌 수 있었던 그의 웃음에 대한 추억을 각자 마음 속으로 어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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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골. 기록과 수용의 장소. 볼록 꼴, 혹은 동굴. 상자, 혹은 매스. 돌, 혹은 성배. 베케트의 모든 장면은 저 자신을 향하는 사유의 질료가 그려내는 굴곡과 투영 속에서 벌어진다. 검은 복도, 높다란 문, 간이 침상의 밑바닥, 늘어진 커튼, 앞으로 걸어가는 아이, 녹음했다 지웠다 다시 녹음하는 기구, 부여되는 명령, 느닷없이 찾아드는 추억, 원조의 손길, 얼룩 하나 없는 속옷.... 이런 것들은 다 무엇인가? 이 모든 것들이 사유의 가능한 표상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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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하늘이 보인다. 각양 각색의 하늘들. 이어 그 하늘들은 온갖 얼굴과 단말마, 서로 다른 사랑의 형상이 되어간다. 뿐인가, 갖가지 행복의 형상까지도. 그러니까, 불행하게도, 행복 또한 존재하였던건가." 빛의 펄럭임 속에서 아련한 추억이 형태를 갖추어 가더니 분주히 움직이며 웅성이다 사라져간다. 글쓰기란 그 전체가 바로 그 이미지들로 이르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그 이미지들이야말로 추억이 입는 영광의 몸이자 어느 날 멈춰버린 것과 머지않아 완결될 것 사이에 세워진 정경, 또는 유령들을 불러내려는 정신의 청원인 것이다. 


역자도 만만치 않으시다. 저자와 같은 감성의 소유자. 저렇게 감성적으로 쓰는 사람은 평소에 어떤 친구를 두고, 어떤 일상 대화를 할지 매우매우 궁금하다!!!1 정말로. 친구들도 다 저렇게 말하려나...? 도저히 상상이 안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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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끌과 먼지라는 존재감, 또는 그 역을 생각해. 잘 생각하려 하면 할수록 입안에서 텁텁하고 밍밍하면서도 매캐한 맛을 구현하는 이것들은 막연해져. 사물과 존재감, 현존과 부재, 아득히 먼 것과 지극히 가까운 것. 이런 건 대체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입안의 돌알과 말 속에 돌올하는 침묵. 돌을 주워 입에 물고 빠는 사람은 긴 시간을 이따위 질문이나 반추하고 음미하는 연옥의 사람. 삼켜도 자꾸 치밀어 올라오는 그 질문에 가까이 다가간 나머지 결국 반추와 음미 그 자체의 무사 무감한 과정이 되어가려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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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두, 미쳐 기대하지 않은

우리말의 횡재에 의해서, 구두

삶은, 정확히 사물들과 사실들의 정확성 사이로 나부끼며 지나가. 바람이나 유령처럼. 하지만 경우에 따라 유령은 또 얼마나 집요하게 사물과 사실들의 틈새를 비집고 되돌아오는지. 추억. 죽은 아버지의 유령이 되돌아와 입을 열대 햄릿의 시간이 제 테두리에 스스로를 짓찧으며 얼마나 사납게 피멍이 드는지 다들 잘 알고 있지. 자연이, 자연스러운 것들이 거기서 비극적으로 일단락된다. 그리고 잿빛의 깊은 멜랑콜리 입장. 

(...) 침묵하는 단순한 사람은 제 안을 가르고 지나가는 숱한 목소리들을 듣는다. 게다가 목소리라는 건... 회상과 상상, 현재와 먼 과거를 가르며 떠오르는 그것은 의미의 반대편에서 그 무엇보다도 허깨비에 가까우며, 그것의 결을 추수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아예 매우 늙고 정신 나간 시간의 한복판에 잠기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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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자꾸 오면서, 또 별수 없이 가면서 여럿이 되는 것 아닌가. 제 앉은 자리에서 폭삭 늙는 시간은 왜 절대적인 속도로 유년의 봄 뜰로 갈까, 침묵하는 삶은 어째서 여러 번 시도 되는 조그만 죽음의 이상한 울림일까, 바꿔 말해 왜 결국 '삶들'일까. 허구의 이야기를 꾸며내어 들려주려는 의도와 어느 한 시대를 진짜로 살아냈던 사람의 생애를 추적하여 전달하려는 시도 사이에 근본적으로 무슨 차이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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